존 필립스는 예술의 대가다. 그의 종이는 캔버스이고 언어는 물감이며 그리고 펜은 그의 붓이다. 이 같은 도구로 하나님 말씀 속에서 해설논평집들, 문헌과 책자들, 설교집, 묵상집 그리고 수 백가지의 감동적인 오디오및 CD들을 만들어냈다. 존 필립스의 자료들은 지도와 해명, 실례 그리고 운율까지도 어디에서든지 목사와 교사 그리고 성경을 공부하는 학생들 누구도 실망 시키지 않는다.
설교
존 필립스 미니스트리 서적
창세기 탐구
세상의 시작과 기원에 관한 기록인 창세기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세상, 인간과 죄, 국가들과 같은 성경의 주된 주제들에 대한 이해의 근간을 이룬다. 저자인 학술 논평가 존 필립은 이 책에서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한 명쾌한 답변을 찾고, 내용의 더 깊은 이해를 위해 히브리어와 배경 정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고 성경의 다른 구절을 인용하면서 창세기 각 구절 하나하나를 생동감있게 펼쳐나가고 있다. 저자의 글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핵심을 담고 있으며 학자와 평신도 모두에게 적합한 스타일로 씌여졌다.
묵상집
그리스도인에게 하루 하루의 묵상시간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동행을 유지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성경 안에서 기도와 묵상과 같은 시간들이 그리스도인들이 삶의 여정을 위한 지혜와 힘을 얻기 때문이다.
그럴때 이러한 경건의 서적들을 통해 믿는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실제성경 통찰력을 찿는데 도움이 될것이다. 존 필립스 박사는 굵직 굵직한 성경의 귀중한 진리를 능숙하게 발견해주시는 분으로 잘 알려져있다. 이러한 묵상집들의 내용은 하나님과 말 할수없이 많은 시간을 지내고 그 분의 말씀을 마음껏 즐긴자의 영감이다. 당신은 존 필립스박사의 이 같은 성경 묵상집들을 통해 그 분의 즐거움에 동참함으로 축복과 격려와 도전을 받을것이다.
이 질문을 한 사람은 놀라버린 한 노인이었다. “어떻게 나이든 사람이 다시 태어날수 있나요?” 나사렛에서 왔다는 젊은 선지자가 이 사람을 중심까지 흔들어 놓았다. 우리는 이 질문자에 대한 정보를 처음부터 바로 얻을 수가 있다. 그는 부자고 존경받는자고, 신앙심이 있는 자인걸 알수 있다. 에델샤임이란 사람에 의하면, 탈무드에서 언급된 니고데모는 당대에 예루살렘 시민중에서 가장 부유하고 존귀한 사람 중 하나였다고 한다. 하지만 탈무드의 그 니고데모가 바로이 니고데모라는 증거는 없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의 니고데모는 나중에 주님의 장례를 위해서 값비싼 향료를 풍부하게 공급할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부유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게다가, 그는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이었다. 산헤드린은 자치기구였는데, 로마제국의 관리 아래에서였고, 테두리안에서지만, 시민법 및 종교법을 만들고 실행할수 있도록 허가를 받은 상태였다.
니고데모가 예수님께로 왔다. 그것은 감히 아무나 하지못하던 일이었다. 주님은 그 바로 직전에 성전을 청소하셨는데, 성전이 (본래의 목적이 아닌) 다른 것에 양보를 하면 안된다고 하셨다. 주님의 그런 행동은 유대 당국자들과 공공연하게 전쟁을 선포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니고데모는 자기 고향 마을까지 들어가서 (내가 생각하기론 그는 예수님이 바로 그 메시야란 것에 동의 했던 것 같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님” (요한복음3:3)이라고 알렸지만, 여전히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는, 혁명적인” 답을 들을 준비가 완전히 되진 않은것 같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한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볼수 없다.”고 (3절). 예수님과 그가 말씀하신 겨우 몇 마디가 이 사람의 하늘나라에 대한 희망의 근간을 완전히 쓸어가 버렸다. 어떻게 나이든 한 사람이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라고 니고데모는 질문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의 말씀이 니고데모를 놀라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 노인의 영혼의 심금을 울렸고 그의 맘속에 깊이 숨겨져 있던, 어릴 때부터 들어왔던 율법주의 보다 더 좋은 무엇에 대한 깊은 필요가 다시금 깨어나게 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에 대해 언쟁하기 보다는 그는 즉시 어떻게 한 사람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냐는 질문으로 넘어간 것이다. 주님은 이 사람의 깊은 영적 필요를 아시고, 주님의 손가락으로 만져 주신 것이다. 그 필요는 그가 느끼던 필요였지만, 그때까지는, 아직 표현하지 못했었던 필요였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어떻게요?”라고 물었던 것이다.
정말 어떻게? 나중에 요한이 그의 복음서를 썼을 때, 그는 주님의 응답을 공식으로 만들었다. (요한복음1:11-13). 그 안에서 요한은 처음으로 우리에게 말해준다. 다시금 태어난다는 것에 해당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부터 설명해준다. 중생은 육신이 피흘려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후손으로 다시 태어 나는 것은 아니다. 영적인 삶은 우리의 부모로부터 물려 받는게 아니라, 우리들이 더욱 하나님을 닮게 즉 더욱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것은 타락한 아담의 본성이다. 게다가, 중생은 육신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즉 이 일은 인간의 욕심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가족의 한 구성원이 되고자 하는 욕심이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주진 않는다는 것이다. 왕실 가족의 한 구성원으로 태어나고자 하는 욕심이 어떤 아이를 왕으로 만들어주진 않는 것처럼. 또한 중생은 인간의 의지로 되어지는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인간의 결정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단호한 결단을 내린다 해도 중생이 일어나게 만들 수 없다. 어떤 사람이 말은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결심했어. 난 내 자신이 영국 왕실가족의 한 구성원이라고 지금부터 나를 그렇게 간주할거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사람은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나야 한다. 사람은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자 이제, 다시 태어난다는 것(중생)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첫째로, 우리는 믿어야 하는 것이 있다. 우리는 반드시 “그의 이름을 믿어야”한다. 그리고 그 이름은 간단하게 말해서, “구세주”란 이름이다. – 그의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해주시는 그분 (마태1:21) 말이다. 바로 이 일이 우리가 해야할 필요가 있는 그 일이다. 그 누군가 우리를 죄에 대한 벌과, 죄의 힘과, 궁극적으로 죄의 존재 자체로부터 우리를 구해줄 수 있는 분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가 있다.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 예수님이 구세주란 것을 믿는 것과, 그를 나 개인의 구세주로 깨닫는 것은 서로 별개의 것이다. 그런데, 나 개인의 구세주로 깨닫는 것은 “내 인생으로 들어와 주세요”라고 그분께 간구하면서, 내가 그를 “받아들일” 때 일어난다는 것이다.
나는 믿습니다! 나는 영접합니다(받아들입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할 부분이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말씀 하신다. “그렇게 될지어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부분이다. 믿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고. 그렇게 하면 하나님은 오직 그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신다. 즉 우리에게 영적 생명을 허락해(부여해) 주신다. 그의 생명, 하나님의 생명을.. 그리고 우리는 그 즉시 그의 가족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그의 성령이 우리 인간의 영 안으로 들어오시고, 우리는 다시 태어난다. 하나님의 가족으로 다시 태어난다.
여기 아주 현저한 사실들이 있다.
-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했던 한 남자가 해골처럼 생긴 갈보리언덕에서 십자가형을 당했다. 그는 당시 형장의 책임자였던 로마의 백부장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사망을 확인 받았다. 그의 죽음은 아주 놀라운 표적들과 기사들이 따랐었고, 그를 처형한 간수들도 그의 죽음을 보고 그야 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다.
- 그는 전에 한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새 무덤에 장사되었으며, 돌로 입구를 잘 봉했고 로마군대가 보낸 병사들이 그 앞에 경비를 섰다. 이러한 예비 조치들은 당시 당국자들에 의해 아무도 그 무덤을 손대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 삼일이 지난후, 다시 확인해본 그 무덤은 빈무덤이었다. 돌로된 문은 굴려져 있었고, 경비들은 두려워 도망가버리고 없었다. 이세상 사람이 아닌 한 사람이 찾아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증언해주었다.
- 그날 내내, 그리고 그 뒤로 계속 되는 몇 주간 동안, 사람들은 예수님이 살아계심을 계속 목격하게 된다.
이러한 일들은 그야말로 사실들이다. 이 사실들은 영광스러운 사실일수도 있고 아니면 이 사실들은 동화나 환상들의 모음에 불과할 수도 있다.
자 여기 부활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들어보자:
그 이후로 돌아다니던, 첫번째 루머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갔다는 것이다. 이 잘못된 주장을 더 뒷받침하기 위해서 유대 공회는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한 그 병사들을 돈을 주어 매수했다. 그들이 지불한 돈은 “많은 돈” (마태복음28:12)이었고, 누군가가 물으면 병사들은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갔다고 말하게 되어 있었다. 이것은 분명히 거짓말이다. 또 한편으로 본다면 로마군대에서 병사가 보초를 설때에 잠을 잔 것에 대한 벌은 사형이었다. 만일 그 병사들이 잠이 든 것이 사실이었다면, 아마도 병사들은 누구보다 먼저 그 사실을 부인해야 했었을 사람들이었다. 유대 당국자들은 그 병사들에게 확신을 주었다. “우리는 총독도 매수할 수 있소이다. 그러니 염려하지 마시오” 라고 그들이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얼마나 보잘 것없는 거짓말 이었는지! 상상해 보라. 어떤 사람이 법정으로 나와서 판사와 배심원에게 말하기를 “판사님, 그리고 배심원 여러분, 저는 제가 아주 확실한 증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설명드린 그 일들이 일어났을 때, 저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거든요!” 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두번째 가설은 그리스도가 제대로 죽지 않았다는 설이다. 그는 그냥 십자가상에서 기절을 했을 뿐인데 급하게 장사지내 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묘지의 냉기 때문에 다시 깨어나서 가까스로 시신에게 입힌 옷과 밧줄을 스스로 풀고 나갔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어두운 밤 저편으로 탈출하여 3일 후에 산자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 그래서 그의 부활에 대한 이야기가 발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많은 문제들을 야기시킨다. 이런 관점은 로마 병사가 기절한 사람을 죽은 자라고 잘못 오해 했다는 가정을 하게 되고, 또한 주님의 친구들이 살아있는 사람을 염했다는 가정을 해야 한다. 그런데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 중에 하나라도, 정말 주님이 살아있었다면 누구든 알아차리지 못했겠는가? 게다가 이 관점은 주님을 십자가형에 처하기 위해 하늘과 땅이라도 움직였던 주님의 지독한 적들이, 주님이 돌아가신 것을 확인하기도 전에 형장을 떠났다는 가정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하지만, 기록들에 의하면 로마 백부장은 이런 가정들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실하게 증언해 준다. 백부장은 병사로 하여금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러 예수님이 죽은 것을 확실히 하라고 명령했다.
예수님은 십자가 형에서 회복했고 도망쳤다고 이 관점은 본다. 하지만 주님의 몸에 있던 모든 뼈가 다 탈골 되었다. 그리고 주님은 양 손과 양 발에 아주 무서운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설에 의하면, 주님은 무덤 안에서 자신을 묶고 있던 천들을 스스로 벗겨냈었고 나중에는 사람들에게 그가 그 천을 통과하여 부활했다는 인상을 풍기기 위해 다시 스스로 감았다고 한다. 그리스도는 또한 그의 탈출을 막고 있던, 무겁고 꽉 막혀 있던 돌문을 스스로 밀어냈다고 한다. 그리고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의 비길데 없이 깨끗한 성품과는 반대로, 주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돌아왔던 체 했다는 거짓말을 하는 죄를 저질렀다고 말해야 한다. 이 관점은 정말 말이 안된다. 이런 관점은 문제를 풀기보다는 더 많은 문제를 야기시키는 관점이다.
세번째 관점은 제자들이 주님의 죽은 영혼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 자신이 이 관점이 지탱하지 못하도록 아주 효과적으로 끝을 내 주셨다. 그가 부활한 육신으로 다락방에 올라가 음식을 같이 먹었을 뿐 아니라, 거기 있던 사람들을 권하여 자신을 직접 만져보게 초대해주셨다.
수년전에, 독실한 믿음으로 유명했던 한 독일 목사님이 베를린에서 열린 나치의 대규모 집회에서 주강사로부터 비웃음을 당했다고 한다. 주강사가 이렇게 말했다. “슈테즈목사, 당신은 완전 바보군요. 이미 십자가에 죽어버린 유대인을 동화처럼 믿다니!” 그러자 그 용기 있는 목사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울려 퍼지는 목소리로 그는 말했다. “예 그럼요. 내가 만약 십자가에서 죽은 유대인을 믿는다면 나는 틀림없이 바보입니다. 하지만 이것 보세요. 나는 살아계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습니다”라고. 우리도 그렇게 믿는 것이 아닌가. 그 둘 중 누구를 믿는가는 완전히 다른 결과를 만드는 것이 아닌가.
사무엘 테일러 코울리지는 고대에 아주 먼 해안을 향해서 항해를 했던 한 뱃사람에 대해 그림과도 같은 시를 썼던 사람으로 유명하다. 거대한 바다새인 알바트로스가 끝없이 먼 수만리 뱃길을 좇아 그 사람의 배를 따라왔다. 그런데 뱃사람은 그 알바트로스 새를 쏘았을 때에, 그 즉시 도움을 주던 미풍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바다는 고요해 졌다. 선원들이 결론을 내리기를 그 알바트로스가 바람을 가져왔었다는 결론이었다. 그들의 친한 그 선원이 그 새를 죽여버렸는데. 하필이면 그 새가 죽는 것과 함께 바람도 잦아져 버렸다는 것이다.
선원들은 얼마 가지 않아 목이 말라 죽기 시작했다. 그들은 바로 그 고대의 뱃사람을 저주하며 죽어갔다. 마침내 그만 홀로 남았다.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아무데도 갈수 있는 곳도 없었고 누구랑 말도 할수 없었고, 그는 후회만 남기고 홀로 남았다. 그때 그가 말하기를
혼자라네, 완전히 나혼자, 혼자뿐이라네
이 넓고 넓은 바다위에 혼자라네
그 어떤 성자라도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네
번뇌에 빠진 내 영혼이여!
외로움이란 정말 두려운 손님이다. 그리고 이 손님은 한번 오면 종종 그냥 곁에 머무른다. 거기, 고향과 친구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한 젊은 남자의 외로움이 있다. 그는 외국의 낯선 도시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였지만 그러나 그 중 누구와도 친구가 되지 못한 채, 상점과 저자거리를 전전하며 방황하고 있었다. 거기 고향집의 방들, 지금은 생명없는 가구들만 남아있고 귀신나올것만 같은 추억들만 남아있는 집만 덩그러니 남은 고향집에서, 그 방들을 헤메이는, 한 아이없는 과부가 느끼는 외로움도 있다.
본 시편의 기자는 이미 전에 외로움을 맛보았었다. 그는 자신이 “광야의 펠리칸”과 같은 존재라고 설명한다. 펠리칸은 광야의 황량한 “황무지”에서가 아니라 원래 바닷가에 사는 존재다. 그가 말하길 그는 “사막의 부엉이” 같았었다고 한다. 부엉이는 숲과 들판이 있는 곳에 사는 존재인 것이다. 그는 또한 “집 지붕위에 혼자 있는 참새”와 같았다고 한다. 참새는 시끄러운 곳에 살며, 자신의 종족들과는 바쁜 교제를 나눈다 (시편102:6-7). 시편기자는 외로움에 대한 생각에 풀이 죽었다.
예수님은 외로움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잘 아셨다. 외로움은 때때로 그를 엄습했고 그를 압도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림같이 생생한 표현이 되어있는 그대로, 감사한 줄도 잘 모르지만, 이미 쉽게 장별 구분이 나뉘어져 있는 그대로 우리한번 읽어보자. (요한복음7:53) “다 각기 집으로 돌아”갔는데 “예수님은 감람산으로 들어가셨다.” 여우도 머리를 누일곳이 있고, 공중의 새들도 둥지가 있는데 예수님은 머리둘 곳 하나 없었다고. 요한복음8:1에 증언해 놓으셨다.
우리 중 누가 예수님의 무서운 십자가 위의, 절규의 깊이에 대해 마음 깊이 헤아려 본적이 있는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마태복음27:46). 그 장면이 그의 사역의 마지막 장면 이었다. 이 장면은, 그의 사역의 시작시점에서, 사단에게 유혹의 시험을 받던 그 어두운 때(마태복음8:20)를 상기시켜주기도 한다.
마가는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들과 함께 40일을 있으셨다”(마가복음1:13)고 우리에게 증언해 주고 있다. 아마도 사단이 그 짐승들을 보냈을 것이다. 로마군인들이 굶주린 짐승들을 경기장 안으로 집어넣어 기독교인들을 잡아먹게 한 것처럼 말이다. 만약 마귀가 예수님이 그 들짐승들에 의해 공격 당할 것으로 상상했었다면, 그는 아주 잘못 생각한 것이다. 그 들짐승들은 예수님 앞에선 마치 길들여진 양처럼 굴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외로움 가운데 있었던 예수님에게 오히려 동무가 되어줬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마저도 시간이 지나자 다들 떠나가 버렸다.
40일간 먹을 것도 없이, 예수님은 그저 한 인간으로서 모든 육체적인 힘도 남지 않은 상태에서 사단의 악한 유혹에 직면해야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령의 권능으로 충만하셔서 악한 자를 직면했다. 성령은 예수님을 한번도 혼자 내버려 두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을 갖고 믿었다. 이사야40:29에 말씀하시기를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라고 한 것 처럼. 우리 주님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단의 유혹을 영광스럽게 이기시고 승리하셨다. 그렇게 하시면서, 우리에게도 본받을 만한 능력의 교훈을 배워주셨다. 하나님의 자녀는 보이지 않지만, 반드시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믿음이다.
시련이나 시험이 없이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도 믿는다는 것도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인생의 시련을 (믿음으로) 잘 직면한다면, 그는 결코 혼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 주님의 약속을 믿어야 한다. 히브리서13:5에 “내 너를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으리라.”고 약속하시고, 마태복음28:20에 또 약속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자녀는 결코 외로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는 결코 혼자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통은 과부의 것이었다. 그녀는 히브리 과부도 아니었다. 모세의 율법은 히브리 과부나 고아에게는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히브리사람이 아닌 이 여인은 그런 것을 공급받을 곳이 없었다. 그녀의 경우는 절망적이었다. 그 모든 것이 그녀 혼자만의 책임이었고, 차갑고 무정한 세상에서 배고파 죽어갈 가능성과 그녀의 현실 사이에는 거의 다 비어버린 밀가루 통 하나만 겨우 있을 따름이었다. — 거의 다 비었다고 했지 당장 그렇게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선지자 엘리야는 이 과부를 만나러 파송되었다. 엘리야는 시냇가에서 머무르고 있었지만, 곧 개울은 말라버렸고 하나님은 그를 시돈지역의 외곽 경비 요충지인 샤르밧지방으로 이끌어 가셨다. 그 시돈에서 엘리야는 한 과부에 의해서 보살핌을 받게 될 것이었다. 엘리야의 반응은 아마도 좀 복합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엘리야가 말하기를, “과부라고?” 했을 것이다. 엘리야는, “난 그 과부가 나이가 많은지 적은지도 모르고 미인인지 평범한지, 부자인지 가난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돈이여! 왜 하필이면, 이곳이 이세벨의 출신지 였을까? 이세벨의 아버지 엣바알은 시돈족속의 왕이기도 했었지. 이지역의 이런 역사적 배경은 내게 위험한 것이 될수도 있을텐데. 이세벨은 내몸에 손대기 위해서 이 땅을 샅샅이 수색하고 있는데.”라고 말했다. 그러나 엘리야는 위험으로부터 도망가는 것으로 선지자들중의 으뜸이 되지는 않았다. 그는 오히려 그 과부를 찾으러 나섰다.
수세기가 지난 후에 예수님은 나사렛에 사는 그의 이웃들에게 상기시켜 주셨다. 엘리야 시대에는,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들이 있었다는 것을.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야를 그중 누구에게도 보내지 않았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이방인 과부에게 보내셨다. 그래서 엘리야는 이방인들에게 보내어진 최초의 선지자가 되었다.
우리는 그 둘이 처음 만났을 때를 그려볼 수 있다. 엘리야가 만난 과부는 확실히 가난했고, 과부에게는 계속 그녀의 앞치마 줄을 꼭쥐고 따라다니는 어린아이가 있었음을 알수 있다. 그러나 생각컨데, 아마도 선지자는 별로 놀라진 않고 말했을 것이다. “실례합니다. 부인. 혹시 주변에 조금 잘사는 과부들 중에 아는 사람은 없나요. 저는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이지역에서 숙박할 방과 음식을 제공할 과부 한명을 찾아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그 과부입니다.”
“아 그래요? 그러면 내게 마실물을 좀 갖다 주시고, 내가 지금 배가 고파서 그러는데, 먹을만한 것을 가져다 주세요.”
“지금 내게 남은 거라곤 통안에 든 곡물가루 한웅큼 뿐인데요. 이거는 나랑 우리 아들이랑 한끼 식사하면 딱 알맞는 양이랍니다. 나는 작은 떡을 만들어서 아들이랑 함께 나눠먹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는 중입니다. 그 떡이 다 구워지면 아들과 함께 나누어먹을 겁니다. 그리고 함께 굶어 죽기를 기다릴 겁니다.
한줌밖에 안 되는 식사라니! 그게 전부였다. 문제는, 누구의 손은 비었고 누구의 손은 풍성한가의 문제다. 감사한 것은 이 경우에서는 풍성한 손을 가지신 분은 하나님의 손이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손은 곡식 평야 전체를 손에 붙들고 있는 손이고, 그 손은 절대로 실패하는 법이 없는 손이다.
엘리야의 사역에 등장하는 이 등식에는 3가지의 연관 인자가 있다. 첫번째로는, 그녀의 거의 다 비어버린 밀가루 통에는 한웅큼정도 되는 먹을것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 식사는 예수님을 예표한다. 모세의 율법중에서 두번째로 위대한 제사라면 소제(곡물제)였다. 그 제사는 죄없는 예수님의 순결하고, 안정되어있고 맷돌아래에서 부서진 주님의 죄없는 인성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이 과부는 또하나 다른 점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간과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비밀이 있었다. 과부는 자신의 그릇에 남아있는 기름이 거의 없었다. 그 기름은 곡물가루와 섞어서 작은 떡을 만들수있는 반죽 정도는 되었었는데. 그 기름은 성령에 대한 예표이기도 하다. 성령은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시고 자신을 드러내신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성령에 의해 잉태되셨고, 성령에 충만하셨고,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셨고,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렸다. 밀가루와 기름이 함께 섞여질때, 아들과 성령님도 함께 섞여졌다.
예수님에 대한 구약의 등식에는 또 하나의 요소가 있다. 이 과부는 두개의 막대기를 들고 있었다. 그 두개의 막대기는 분명히 십자가를 상징하는 것이다. 십자가를 만드는 데에는 두개의 나뭇가지가 필요하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필요 없다. 그 과부는 그녀가 필요한 그 것을 꽉 쥐었다. 그런데 그게 바로 예수였다. 예수님은 소제의 예수님이고, 위로자고, 배의 연료고, 십자가다. 그 두개의 가지들은 그 과부를 마지막까지 함께 했다.
거의 비어있던 그 통은 실제는 완전히 다 비어있지 않았다. 그 기름은 매일매일의 삶을 지내는데 필요한 양을 겨우 만족시키는 양이었다. 그리고 갈보리의 십자가 공로가 그 매일매일의 삶의 모든 것을 보살펴 주었다. 우리가 정말 깊은 필요를 느끼는 중에, 하나님을 처음으로 만났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물어보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찌됐든 위로자인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 사역에 대해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어야 된다고 권면하신다. 주님에 대한 바로 그 믿음이 우리와 끝까지 함께 할 것이다.
그 길은 길고, 위험하고, 악한 길이었다. 그 길은 선지자 사무엘이 사는 라마에서 시작해서 엔도의 접신한 여자가 사는 장소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물론 그녀는 거기에서 먹고 살만한 어떤 일도 할수 없었다. 왜냐하면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접신한 여자는 죽이라고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하며 살고 있었다. 그녀의 집으로 가는 그 길은 바로 사울왕이 걸어간 길이었다. 사울왕이 거기에 도착하는데 40년이 걸렸다. 그리고 사울왕이 그길을 다 갔을 때에 그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사울이 걸어갔던 그 멀고 내리막인, 구비구비 길엔 여전히 길가의 이정표들이 그 길을 그려주고 있다.
최초의 이정표는 사울의 결국 발현되지 못한 잠재력 (사무엘상11-12) 을 가르켜 준다. 그는 젊었을 때에는 인상적인 인물상의 표상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중엔 백성들에 의해 왕으로 선택받게 된다. 왜냐하면 그가 아주 남자답게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처음 출발을 아주 잘했다. 야베스 길리앗이란 도시를 힘셈 암몬왕의 손으로부터 구해냈다. 이 승리가 이제 연로해져 가는 사무엘더러 빨리 은퇴하라고 재촉하는 결과가 되기도 했다. 왜냐하면 사울은 그일로 좋은 왕이 될수있는 잠재력을 가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울은 그 왕권을 헛되이 낭비하고 만다.
두번째 이정표는 사울이 한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된 예측을 가르킨다 (삼상13장). 어느날 블레셋과의 전쟁이 일어나자 연로한 사무엘이 약속했다. 자기가 와서 사울의 병사들을 축복해 주겠다고. 그리고 그 일을 할 시각까지 알려주었다. 약속된 그 주간이 왔다. 그때 병사들은 진영을 버리기 시작했고 사무엘은 여전히 오지않고 지체했다.
사울은 그의 군사를 다 잃을 것 같았고, 점점 인내심을 잃어갔다. 그래서 그는 제사장의 역할을 자신이 직접 수행했다. “사무엘이 꾸물거렸다면, 그건 결국 사무엘 자신한테 문제지” 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사울은 제사장의 독점적인 영역을 침범했고 그의 제물을 스스로 잡아 제사를 올렸다. 사울은 하나님이 사무엘의 지체함을 허락하셨고 그 가운데, 하나님이 자신을 시험해보고 계신다는 것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사무엘이 나중에 나타났을 때에, 연기가 그의 제단에서 여전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사무엘은 사울을 꾸짖었고 사울이 이스라엘 왕국을 상실했다고 말했다. 게다가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한” 사울의 후계자를 이미 생각하고 계셨다.
세번째 이정표는 사울의 때를 맞추지 못한 뒤로 미루는 행동을 가르킨다. (삼상14장). 종잡을수 없는 블레셋과의 전쟁은 결정을 봐야 했다. 하지만 사울은 블레셋과 싸울만한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사울의 아들인 요나단이 앞장을 섰다. 그때 사울왕은 무었을 했던가? 우리가 들은 것 처럼 그는 기브아땅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서, 석류나무 아래에서 시간을 질질 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 한번은 잘못된 추측으로 실패했는데, 지금은 시간을 지체해서 실패했다.
네번째 이정표는 그가 한 일의 불만족스러운 성과다. (삼상15장) 마침내, 전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쓰라린 적의를 보였던 아말렉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말할 차례다. 하나님의 명령은 “완전히 도륙하라”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이 무자비한 적을 대상으로, 마지막으로 한번 전쟁을 해야했다. (성경에 등장하는 유형론에 의하면 아말렉은 육적인 것을 대표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육적 습성을 다루라고 한다. 사울이 아말렉 족속을 과감하고 철저하게 상대하듯이)
사울은 결국 승리했다. 하지만 아말렉의 왕 아각을 살려주었고 소떼와 양떼중 가장 좋은 것을 남겨두었다. 사울은 또하나의 시험에서 실패했다. 사무엘은 사울의 변명을 분노하며 밀쳐내 버렸다. 사무엘은 사울을 불손종한 자라고 부른다. “불순종은 접신의 죄와 같다.”라고 사무엘은 말한다. 사울왕의 미래와 마지막 운명에 대한 예언의 눈으로 사무엘은 그렇게 말한 것이다. 진실로 이것은 주목할 만한 이정표다. 이 사례는 사울의 왕조에 대해서, 그리고 범죄하는 삶이 미래에 이렇게 시작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떤 영적인 타당성도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예표한다.
다섯번째 이정표는 사울의 감출수 없는 영적 마비를 가르킨다. (삼상17장) 블레셋 족속은 전쟁을 선포했고 그들의 거인 골리앗을 내세웠다. 골리앗은 사울(그 자신도 몸이 거구인)을 도발하여 앞으로 나와서 자신과 남자대 남자로 싸우자고 했다. 사울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는 너무 무서워, 젊은 청년인 다윗이란 자가 대신 나가 그 거인과 싸우게 했다. 사람들은 곧 사울의 행동이 얼마나 비겁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여섯번째 이정표는 죽음의 계곡에서 그의 자리를 대신한 사람을 사울이 끊임없이 박해하는 것을 가르킨다. 24번 이상이나 사울왕은 다윗을 죽이려고 했다. 어느 암울한 날, 사울은 그들의 대표가 다윗에게 떡 몇조각을 주고 골리앗의 칼을 줘서 그 나라를 도망갈수 있게 도왔다는 것을 들어 대역죄로 몰아, 한 제사장들의 공동체 전체를 몰살시켰다.
그리고 사울왕은 마침내 접신하는 여자가 살고 있었던 엔도로 왔다. 사무엘은 이미 죽었고. 사울이 기도했을 때 하늘은 침묵했다. 그리고 다시한번 블레셋 족속이 침략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울이 새로 세운, 종이인형 같은 대제사장은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답도 얻어낼 수 없었다. 그래서 사울은 접신하는 여자에게 도움을 구했다. 사울은 하늘의 문을 속절없이 두드렸다. 사울은 사실상 지옥의 문을 두드리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문을 갑자기 그리고 놀랍게 열어버리셨다. 접신하는 여자가 늘상 하던 대로 한 혼령이 나타나는 게 아니라, 죽은 사무엘이 나타나서 사울에게 죽음을 선고한다. 그래서 보통때 같으면 빗장을 잠그고 안전장치를 채워뒀던 문을 하나님이 열어 버리시고 그안으로 사울을 밀어 넣어 영원히 거기 머물도록 하셨다.
수세기 전에 돈을 주고 매수한 선지자 발람은 말하기를 (민수기23:10) “나는 의인의 죽음을 죽기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노라”고 했다. 하지만 그도 또한 하나님의 심판아래 죽었던 것이다. 우리는 의인의 삶을 살지 않은 이상 의인의 죽음을 죽을 수 없다. 사울왕도 결코 그렇지 못했다.
기부
존 필립스 미니스트리 인터내셔널은 필립스 박사의 주석서들이 미국과 전세계에 특히 성경에 대한 지식이 매우 제한되어있는 제 3세계국가에 하나님께서 재정적으로 우리를 허락하신다면 필립스 박사의 여러 책들을 다중언어로 번역하기를 헌신해오고있다. 이런 감격스럽고 가치있는일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우리와 함께하기를 초대한다. 모든 기부금은 세금공제된다.